쉽지 않은 문제
예전에, 대학의 연합동아리 엠티를 갔을때였다. 대부분의 엠티가 그렇듯 열심히 먹고 마시며 떠들던 와중에 모 체대의 두 사람이 잘 놀다가 윗학번의 '말이 짧다?'는 한마디에 곧장 일어나서 머리를 박는 후배를 봤다. 아마도 술이 들어가다 보니 말실수를 잠깐 한 모양인데, 곧장 일어나서 머리 박는 그 모습이 너무도 민첩함에 놀랐다. 잘 훈련되어 몸에 배어있는 느낌이랄까..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듯, 선배의 짧은 한마디에 곧장 머리를 박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벙쪄있는 내게 다른 선배가 '체대 애들은 기가 세서 저렇게 안하면 통제가 안된다'고 살짝 설명을 해줬지만 그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써는 이해가 안가는 모습이었다. 체대의 경우 후배가 선배보다 운동실력이 좋을 수도 있고, 그럴경우 통제가 안될 수도 있어 미리 길들이기(?)를 해둔다는 것 같았지만, 애시당초 왜 선배가 후배를 '통제'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냥 알아듣는 척만 했을뿐이었다.
설득의 심리학을 보면 선배가 후배를 굴리는 행사가 원시부족의 성인식과 매우 흡사한 절차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기숙사 신입생들을 상대로 한달정도 폭력을 동반한 괴롭히기가 매년 반복되고 있고,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는경우도 자주 나와서 지역경찰과 학교에서 그런 행사를 없애보려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단속하면 할수록 음지에서 점점 더 위험한 행위로 발전해서 그냥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CSI에서도 몇번 에피소드로 다룰 정도이고.
책에서는, 그런 행위가 고난을 통한 일관성의 강화로 '난 이런 고난을 겪고도 이 모임에 들어와있다'라는 식으로 모임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강화시킨다는 이야기를 한다. 괴롭히기 행사가 일종의 진입장벽 역할을 해서 자신이 그 진입장벽을 넘었다는 느낌을 통해 일관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다. 동아리 가입시 전기고문을 받은 사람들이 전기고문을 받지 않은 사람보다 동아리활동에 더 적극적이라는 실험결과도 언급하고 있고 ;;
다만 우리와 미국의 차이라면 미국은 그런 행사가 일정기간동안에 한정되는 반면, 우리나라는 그 기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점이랄까. 왜곡된 유교문화와 군사문화가 빚어낸 현상치고는 너무 화려한 듯한 느낌이다.
(규항넷의 글을 읽고 든 생각은) 이런 일을 막고 싶다고 해도, 없어지는것은 불가능할테니..선배의 입장이 된다면 그 기간을 줄이고, 일상화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게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지..
덧, 체대의 문제는 그렇다고 치고..예대쪽도 만만치 않다는 건 정말 이해불능. 예술가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 아니던가? 세상을 향해 자유로움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선배를 향해서는 못하는걸까?
또 덧,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운좋게 폭력을 피해다녔다. 고등학교때도 그렇고 대학교때도 내가 들어간 해부터 선배가 후배를 굴리는 일도 없었고 사발식같은 무식한 짓도 없었다. 하지만, 말그대로 운이 좋았을뿐. 대다수는 나같은 행운을 누리진 못하고 있다..